"고령선비<예곡 곽율> 아직도 시례지가(詩禮之家)유풍 이어 임란 창의(倡義)의 고장 합천에서 ''지릿재''를 넘어서면 경북 고령 쌍림면이다. 지금은 행정구역상 경상북도 땅이지만 예전엔 합천과 마찬가지로 창의의 고장이며, 경상우도 유맥을 이어온 고장이다. 경북 땅을 들어서 조금만 가면 길가에 ''점필재김종직선생종가''가 보인다.
점필재 종가를 뒤로하고, 기자는 남명의 문인이며 임란 창의 인물인 예곡(禮谷) 곽율의 행적을 알기 위해 종택을 찾아갔다. 고령 가는 길목 ''월막리(月幕里)'' 라는 마을에 예곡 종택이 있었다. 현재 13대 종손 은열(殷烈)씨가 종택을 지키고 있는데, 후손들은 예곡이 세상을 떠난 후 이곳에 이주하여 지금까지 400여년을 살아왔으며, 종택 옆에 모례정(慕禮亭)을 세워 조상의 은덕을 기리고 있다.
예곡 곽율은 어떤 인물인가. 선비로서 높은 학문과 임란때 초계군수로서 의병들과 많은 전공을 세운 남명의 제자이다. 예곡의 인물됨을 단적으로 말해 주는 글이 있다. "남명선생 문하에 예곡 곽공이 있었다. 공은 일찍부터 스승의 가르침을 잘 받들어 포산(지금의 현풍) 오현 중 한 분이 되었다. 한강, 동강 등 여러 선비들과 학문을 부지런히 닦아 깨끗한 선비로 이름이 났으며, 천거로 관직을 제수 받아 고을의 수령으로서 선정을 베풀어 최고의 치적을 나타내었으며, 임란때 안음현으로 피해 있다가 초유사인 김학봉 선생이 여러 사람의 신망에 따라 임시로 초계군수로 임명하니 곧 조정에서 정식으로 임명하였다.
또한 적과 싸우며 성을 방비하며 많은 적을 죽이고 마침내 지치고 병들어 세상을 떠났으나 왜적이 감히 강우지방을 침범하지 못한 것은 공이 힘이 지대하였다." 실학자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종손(從孫)이며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절친한 벗인 금대(錦帶) 이가환(李家煥)이 예곡을 두고 한 말이다. 예곡은 1531년 현풍(玄風) 솔례(率禮)에서 참봉공 지인(之仁)과 창녕조씨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자는 태정(泰靜)이다. 이보다 앞서, 예곡의 고조부인 청백리 안방(安邦)이 현풍의 대니산 아래 솔례동에 터를 잡고 살고 있었다.
예곡은 어릴 때부터 경전을 읽을 때는 글의 내용을 조금도 놓치지 않고 공부하여 주위의 칭송을 받았다. 종숙(從叔) 연일당(燕日堂) 지운(之雲)이 여러 사람들에게 "율은 장래가 촉망된다"고 칭찬하면서 소학을 가르치니 책에 있는 것을 그대로 본받아 효도하고 공경하는 마음을 실천하였다. 청년 시절, 산해정(山海亭)으로 남명선생을 찾아가서 제자의 예를 올리고 학문에 정진하였으며, 29세때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당시 남명의 문인들인 한강 정구, 동강 김우옹, 낙천 배신 등과 도의(道義)로써 교유하기도 하였다. 명종조 요망한 승려 보우(普雨)가 조정을 어지럽히자, 영남의 많은 선비들이 상소를 올려 이를 물리치고자 하였는데, 이때 예곡이 소수(疏首)로 추대되었다. 이 사실은 당시 유림에서의 예곡의 명망을 가늠케 해 주는 일이라 하겠다. 예곡은 43세때 천거로 조지서별제(造紙署別提)라는 벼슬을 받아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불혹이 넘은 나이에 종이를 만들고 관리하는 기관의 종 6품 벼슬길에 오른 것이다. 이듬해 김천도찰방(金泉道察訪)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찰방은 역의 교통 통신과 관련한 업무와 말을 관리하며 관내 백성들에 대한 대민 업무도 수행하는 직책이다. 찰방으로 있으면서, 지역 백성들의 세금 중에서 명분이 없는 세는 절반으로 줄이고, 한 조각 물건도 사사로이는 취하지 않았으며 거둬들인 쌀이나 베 등을 절약하여 저축해 두었다가 공공의 일에 사용하기도 하여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다. 56세때 홍산현감(鴻山縣監)으로 임지에 내려가 민심과 문풍을 쇄신하였으며, 61세때는 예천군수(醴泉郡守)를 지내기도 하였다.
이듬해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예곡은 예천군수직에서 물러나 덕유산 아래 갈천동(葛川洞)에 있었는데, 당시 초유사(招諭使)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이 사람됨을 알아보고 초계가수(草溪假守)로 임명하였다. 가수란, 전쟁중 수령이 없는 곳에 그 지역의 명망 있는 사람을 임시로 임명한 후에 그 직을 수행하게 한 것을 말한다. 임금의 정식 임명을 받을 겨를이 없어 임시로 초유사가 임명한 것이다.
초계가수로 부임한 예곡은 당시 초계 의병장인 전치원(全致遠) 이대기(李大期) 등과 낙동강에서 배로 침입하는 왜적을 수차에 걸쳐 토벌하였으며, 특히 의병군에게 군수물자를 공급하는 일에 많은 공을 세웠다. 전쟁 중에 고을의 수령으로서 의병들이 전투에 나가 왜적을 무찌르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백성들의 고단한 삶을 어루만져 주기도 하였다. 예곡의 이런 모습을 본 학봉 김성일은 "만약 모든 고을이 초계군과 같이 忠과 誠을 다한다면 백성들의 소생과 국가의 중흥을 어찌 근심하리요"하면서 칭찬을 하였다.
예곡이 초계가수로서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자, 도내 유생 정유명(鄭惟明) 등이 상소하기를 "초계는 낙동강 변의 요충지로서 적의 왕래에는 여기를 거쳐야 하는데 감히 오지 못하는 것은 곽율이 마음을 다하여 방비한 때문입니다. 따라서 정식으로 임명하여 그 공을 세우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얼마 후 예곡은 초계군수로 정식 임명되니 가수로 있은 지 3개월 만이었다. 정식 초계군수로 임명된 예곡은 의병 지원과 백성들을 보살피다 난중에 너무 과로하여 초계의 관사에서 세상을 떠니 향년 63세이다.
현재 포산(苞山. 지금의 현풍) 지방을 중심으로 학행이 뛰어난 5명의 선비를 ''포산오현(苞山五賢)''이라 하여 남긴 학풍을 칭송하고 있는데, 예곡 역시 오현 중 한 분이다. 1695년 동방오현의 한 분인 한훤당 김굉필을 모신 도동서원(道東書院) 별사(別祠)에 곽승화, 배신, 원개 등과 함께 배향을 하였으니, 포산오현을 모신 것이다.
도동서원 별사 봉안문에 "한훤당 김굉필의 높은 학덕을 이어받고 남명에게 직접 사사하여 경의의 공부로 진리를 몸에 익혔고,..........."라고 하여 예곡이 한훤당의 학덕과 남명의 경의(敬義)정신을 이어받았다고 하였다. 이후 도동서원 별사는 대원군 서원철폐때 훼철되고 1990년 현풍에 화산서원(花山書院)을 창건하여 예곡을 모시고 제향하고 있으며, 고령에는 13대 종손 은열씨, 의성군수를 지낸 경열(敬烈)씨를 비롯한 많은 후손들이 시례지가(詩禮之家)의 유풍을 그대로 이어가고 있다.<1997.1.31. 경남일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