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천선비<내암 정인홍 2> 고향서 영의정 산림정승 추앙 내암이 기축옥사 후 조정에서 물러나 산림에서 생을 보내고 있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이때 내암은 곧 김면(金沔)과 함께 적을 막을 계책을 논의하러 거창에 있던 순찰사 김수를 찾아갔다. 김수를 만난 내암은 "지금 적에게 짓밟히게 된 것은 성이 튼튼하지 않거나 군사가 용감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변방의 장수, 수령 등이 스스로 궤멸하여 도망한 때문에 이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그대는 한 도의 원수이니 마땅히 힘을 다해 적을 막을 방책을 마련해야 합니다" 라고 김수에게 적을 막을 방책을 강구해야 된다고 강력히 주장하였다. 하지만 김수는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이에 내암은 다시 돌아와 김면에게 이르기를 "우리들은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입고 있는데 이런 대란을 만나 적 때문에 길이 막혀 임금께서 있는 곳에 나아가 죽지 못한다면, 창의하여 전쟁터에서 죽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어찌 일반 백성들처럼 도망하여 국가가 망하는 것을 보고 구차히 살길을 찾겠습니까"라고 하면서 적을 무찌를 것을 결의하였다. 드디어 5월 10일 김면과 함께 합천 숭산동(崇山洞)에 모여 뜻을 같이 하는 선비들을 규합하여 창의하였다. 내암선생가장(來庵先生家狀)의 기록이다.
6월 초순경에는 의병을 모집하였다. 곽율, 박성, 권양 등과 문인인 하혼(河渾), 조응인(曺應仁), 문경호(文景虎),박이장(朴而章) 등이 중심이 되어 각 군에서 의병을 모아 각각 주둔을 하였다. 내암은 합천군 가장(假將)인 전첨사(前僉使) 손인갑(孫仁甲)을 중위장(中衛將)으로 삼아 방어의 계책을 세웠다. 6월 22일에는 김면과 같이 군사를 이끌고 거창에 모여 초유사 김성일과 함께 적을 무찌를 방책을 논의하였다. 이때 내암은 의령의 곽재우, 거창의 김면, 초계의 전치원, 이대기 등과 고령 성주의 의병들 사이를 왕래하면서 위급한 곳을 지원하는 일을 맡고 있었다. 내암이 임란때 의병장으로서 올린 전공은 무계(茂溪)전투, 초계(草溪)전투, 안언역(安彦驛)전투, 성주성(星州城)전투, 진주성지원전투 등을 들 수 있다.
무계는 현풍과 성주 사이에 위치한 수륙의 요충지였다. 즉 적의 중요한 보급로였다. 내암이 거느린 의병들은 고령 성주 의병들과 합세하여 6월 6일 새벽 무계의 적을 기습하였다.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기 위해서 였다. 6월 23일에는 초계에서 적 보급선 12척을 공격하였다. 이때 의병장 손인갑이 말을 타고 강중에 뛰어들어 적선을 추격하다가 진흙에 얽혀 말과 함께 익사하였다. 8월과 9월에 성주성을 탈환하기 위해 공격을 하였으나 성을 회복시키지는 못했다. 10월 진주성 1차전투때 적에게 포위된 진주성을 구하러 오기도 하였다. 내암은 이러한 전공으로 진주목사, 제용감정(濟用監正) 성주가목(星州假牧)등의 벼슬을 제수받았다. 계사년(1593) 9월에는 당시 체찰사(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의 청으로 영남의병대장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장문의 상소를 올려 나라가 전쟁에 휘말려 혼란을 겪어야 했던 원인을 분석하고 앞으로 전쟁을 극복하고 전후 국가를 재건하는 방법을 말하였다.
이듬해 상주목사, 영해부사등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어 형조참의, 부승지등에 제수되었으나 다 나아가지 않았고 67세때 사헌부 대사헌으로 제수되자 상경하였다가 병을 핑계로 세번 사직소를 내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 이후로 내암은 조정에서 실질적으로 관직생활을 하지는 않았다. 1604년 남명 조식선생의 문집을 간행하였다. 이때 쓴 발문에 퇴계 이황을 논란한 것이 문제가 되어 성균관 유생들이 들고 일어나 팔도의 향교에 통문을 돌려 내암을 규탄하였다. 이 일로 인해 내암은 퇴계 제자들과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다.
1608년 당시 영의정 유영경이 영창대군을 옹립하여 정권을 계속 유지하려는 음모를 꾸민다고 상소를 올렸는데, 이 일로 인해 영변으로 귀향을 가게 되었다. 유배 도중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곧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왔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한성판윤,대사헌, 찬성 등의 벼슬을 내렸으나 사직소를 올리고 출사하지 않았다. 1610년(광해군 2년) 9월 오현(五賢)의 문묘종사(文廟從祀)가 있었다. 종래 문묘에 모셔 오던 선현들 외에 새로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조광조(趙光祖) 이언적(李彦迪) 이황(李滉)을 문묘에 모시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이때 내암은 왕이 그의 문병을 위해 내의와 예관을 보내 상경할 것을 당부하자, 사직소를 올리면서 이언적 이황의 문묘종사가 부당하다고 말하였다. 즉 퇴계가 남명과 성운(成運)을 평한 말을 빌어, 이황의 출처(出處)가 분명치 못함을 비판하였다. 이 일로 인해 조정과 사림에서는 큰 논란이 일어났다. 퇴계 제자가 중심이 된 성균관 유생들은 권당(捲堂 :현재의 동맹휴학과 같음)에 들어갔으며 성균관의 청금록(靑衿錄)에서 이름이 삭제되기도 하였다. 청금록은 성균관에 비치된 유생들의 명부(名簿)이다.
1614년(광해6) 좌의정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해 조정에서는 강화도에 유배되어있던 영창대군을 죽이려 하였는데 내암은 영창대군이 어려서 역모에 가담할 수 없었다고 하면서 신원소를 올렸다. 1617년 82세의 나이에 영의정으로 제수되었다. 하지만 고향에 있으면서 사직소를 올리고 그 자리에는 나아가지 않았다.
1618년 인목대비의 서궁유폐가 이루어지고 이어 폐모논의가 일어났다. 이때 내암은 영의정으로서 의정부에 글을 보내 반대의사를 밝혔다. 그리고는 이해 3월 영의정을 사직하는 상소를 올리고 그 후로 죽을 때까지 도성 출입은 물론 상소도 올리지 않았다. 이후 사람들은 내암을 산림정승(山林政丞)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이 성공하자 폐모론을 주도했다는 죄명으로 합천서 서울로 압송된 지 5일만에 처형을 당했으니 이때 나이 88세였다. 죽기전 내암은 폐모론을 주장한 적이 없다고 강변을 하였으나 모두 허사였다. 사직은 했지만 명목상 영의정이었고, 또 간신 이이첨이 이 직권을 도용하여 광해조 어지러운 정치를 부채질하였기 때문에 내암 역시 이를 벗어날 수 없었다. 내암 사후 280여년이 지난 1908년(순종 2년) 역적의 죄명이 벗겨지고 관직이 다시 회복되었다.
지금 내암의 후손들은 선대의 잘못 알려진 역사를 바로 잡으려고 무척이나 애를 쓰고 있다. 아울러 합천임란기념사업회를 중심으로 내암의 의병활동을 재조명하고자 힘을 기울이고 있기도 하다. (1997.3.21. 경남일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