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선비<수우당 최영경2> 간신들 모함으로 억울한 죽음 1589년 10월 황해도 안악군수 이축(李軸), 재령군수 박충간(朴忠侃) 신천군수 한응인(韓應寅)등이 전주에 사는 전홍문관 수찬 정여립(鄭汝立)이 역모를 꾀하고 있다는 보고를 황해도 관찰사 한준(韓準)에게 올리고, 한준은 이 사실을 즉시 조정에 장계를 올린다.
이른바 정여립 모반 사건은 이렇게 하여 시작되었다. 정여립이 벼슬에서 물러난 뒤 전주와 진안 금구 등지를 왕래하면서 일당을 모아 대동계(大同契)라는 단체를 만들어 매월 활쏘기를 익혔으며, 또 당시 민간에 유포되어 있던 도참설을 이용하여 민심을 현혹시킨 뒤 기축년 말에 서울에 쳐들어 갈 계획을 세우고 그 책임 부서까지 정해 놓았다는 것이 황해감사의 장계 내용이다. 이 사실을 안악에 살던 조구라는 사람이 자백을 했다는 것이다.
이 기록에 의하면, 당시 민심을 현혹시킨 뒤 서울에 쳐들어 갈 계획을 세우고 그 책임부서까지 정해 놓았다는 엄청난 역모를 정작 일이 발생한 전라도에서는 모르고 함경도에서 먼저 알아 이를 조정에 보고하였다는 것이다.
당시 서울로 쳐들어가려면 많은 군사 무기 군량 등이 필요한 것이 이치인데, 이 사건이 마무리 될 때까지 이에 대한 언급은 어느 기록에도 없다. 이 사건으로 3년여에 걸쳐 동인계(東人系) 인물 1,000여명이 투옥, 또는 유배되거나 죽었다는 점을 상기해 볼 때 반대파의 모함과 음모가 없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선조 17년(1584) 율곡 이이가 죽자, 세력을 잃은 서인들이 이 사건을 계기로 재기를 노리려고 사건을 확대, 과장하여 평소 자신들이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수많은 사람들을 연루시킨 옥사가 바로 기축옥사(己丑獄事)라고 할 수 있다.
수우당은 이 사건의 주모자 길삼봉(吉三峯)으로 몰려 선조 23년(1590) 진주옥에 갇히게 된다. 이보다 앞서 조정에서는 선전관과 의금부 도사를 황해도와 전라도로 보내 정여립 모반 사실을 확인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정여립은 이 소식을 듣고 아들 옥남(玉男)과 진안의 죽도로 도망하여 자결하였는데, 옥남이는 죽지 않고 살아나 체포되어 국문을 받던 중 ''길삼봉이 주모자''라고 말하였다.
이 말을 듣고 조정에서는 길삼봉을 잡아들이라고 하니 각도에서 ''삼봉''이라 하면서 잡아 보낸 이가 한 둘이 아니었다. 가공인물인 길삼봉이 나타날 리 없었다. 그래서 옥사를 일으킨 측에서 "삼봉은 길씨 성이 아니고 최삼봉인데 진주의 노비"라고 까지 조작을 하였고, 소문은 더욱 과장되어 마침내 "삼봉은 진주에 사는데 나이가 60세쯤 되었으며 얼굴은 쇠빛인데 여위고 수염이 길어 복무까지 닿고 키는 크다"라고 하여 수우당의 외모와 비슷하게 만들어 "삼봉은 진주의 최영경"이라고 조작을 하였다. 이렇게 하여 수우당은 아우 여경(餘慶)과 함께 진주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이때 수우당의 나이 62세때 였다. 수우당이 옥에 갇힌 후, 관에서는 수우당이 길삼봉이라는 증거를 조작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때 진주판관 홍정서(洪廷瑞)는 진주선비 석정(石亭) 정홍조(鄭弘祚)에게 위협하여 말하기를 "내말을 들으면 그대에게 좋은 일이 생길 것이다"라고 하였다. 석정은 거짓으로 응낙하였다가, 서울 국문 현장에서 말하기를 "판관이 근거 없는 말을 날조하여 나를 사주하였으나 내 감히 어진 사람을 모함할 수 있겠는가."하면서 수우당을 보호하였다. 서울로 압송된 수우당을 선조가 친히 심문을 하고는 그 억울함을 헤아리고 곧 석방을 시켰다. 옥에서 풀려나 며칠간 집에 머물고 있을 때, 우계(牛溪) 성혼(成渾)이 그의 아들을 보내 쌀 한말을 주며 "장차 향리로 내려간다는 말을 들었으니 이것으로 노자를 삼으십시오"하고 묻기를 "공께서 누구의 미움을 받아 이렇게 되었습니까"하니 수우당이 말하기를 "너의 애비에게 미움을 받았다"라고 하였다.
수우당이 서울에 있을 때 안민학(安敏學)이라는 자가 날마다 찾아와 수우당을 문안하고는 돌아가 성혼에게 일러 말하기를 "이곳에 崔處士가 살고 있는데 참으로 뛰어난 선비입니다.
공은 어찌 찾아 뵙지 않습니까"라고 하였다. 성혼이 이에 찾아가 뵈기를 청했다. 이로부터 수우당은 때때로 성혼과 왕래를 하였으나, 외척과 서로 친하게 지낸다는 말을 듣고 그와 교제를 끊어 버렸다. 이일로 인해 성혼이 수우당에게 좋지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으며, 급기야 옥사에 연루시키게 된 것이다. 성혼의 아들이 찾아온 다음날, 다시 사헌부에서 장계를 올려 수우당을 국문 하기를 청했다.
수우당은 다시 국문을 당하면서 온갖 곤욕을 겪었으나 태연자약하였다. 갖은 곤욕을 당하면서 옥살이를 하던 중, 하루는 정신이 혼미해져 곁에 있는 사람의 무릎을 베고 눕게 되자 좌우에서 "한 말씀 교훈을 남겨 주십시오"하니 얼마후 천천히 일어나 붓을 잡아 크게 ''正''자를 썼으나 자획을 다 마치지 못하고 조용히 세상을 떠나니 향년 62세였다.
1594년 수우당의 억울한 누명은 벗겨지고 대사헌(大司憲)으로 추증되었으며, 특별히 선조께서 예관을 보내 제문을 내려 충절을 기렸다. 수우당의 학문은 자기를 성찰하고 실천에 힘쓰는 것을 주로 하였다. 독서를 할 때는 한 자도 가볍게 넘기는 일이 없었으며, 문장을 이야기 할 적에 많이 아는 것으로 남에게 뽐내지 않고, 도리를 말할 때는 항상 모자란 듯이 남에게 자기를 낮추었다.
혹 명성을 듣고 배우기를 원하는 이가 찾아오면 "나의 학문이 그대를 가르치기에 부족하다"고 하면서 사양하기도 하였다. 광해 3년(1611)에 진사 하징등 유림 300여명의 상소로 덕천서원에 배향할 것을 허락 받아 위패를 봉안하였다.
그 후 덕천서원이 훼철되자, 영남의 유림들이 1918년에 존덕사(尊德祠)와 수정당(守正堂)을 세워 위패를 모셨으며, 다시 1936년에 옛 만죽당(萬竹堂) 자리에 도강서당을 세우고, 1984년 청풍사(淸風祠)를 지어 매년 향사를 드리고 있다.
한말 학자 회봉(晦峰) 하겸진(河謙鎭)은 "조선 선조때 儒賢 守愚堂 崔先生은 山海門庭의 高弟이다. 기축년 옥사에 간특배들의 모함으로 옥에서 세상을 떠났으나 그의 죄가 아니었다"라고 하면서 수우당이 남명 문하의 수문인(首門人)으로서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것을 후세에 밝히고 있다.
기자는 청풍사를 참배하고 내려오면서 ''正''자를 쓰다가 세상을 떠난 수우당의 강직한 모습을 떠올려 본다. 선학산 대숲바람이 귓가를 스치고 지나간다.(1996.12.20.경남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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