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은 경남일보 강동욱기자가 연재한 <江右儒脈>을 옮겨 놓은 것입니다. 거창선비 <갈천 임훈 1> 하늘이 내린 효자 거창 수승대(搜勝臺)를 지나 서북쪽으로 조금만 가면 북상면(北上面) 갈계리(葛溪里)라는 마을이 나온다. 마을을 들어서기 전 길가에 세운 [葛川洞門]이라는 표지석이 눈에 띈다. 갈천(葛川)선생 유풍(儒風)이 깃들은 마을임을 알리는 글귀다. 마을에 들어서자 한가운데 [孝子旌閭碑閣]이 마을의 내력을 말해주듯 방문객을 맞이한다. 갈천 선생, 아우인 첨모당(瞻慕堂)을 비롯한 후손들의 효행을 기려 나라에서 표창한 내용을 적은 비석들이다. 온 마을이 갈천선생이 남긴 유풍에 흠뻑 젖어 있는 듯했다. 선생의 종택(宗宅)을 들어서니 [孝子行典牲署參奉 林薰之門 明廟甲子命旌 後積仕至掌隸院判決事 贈 吏曹判書 諡 孝簡公]이란 현판이 이채로웠다. 내용은 {전생서참봉 벼슬을 지낸 효자 임훈의 집. 명종 갑자년(1564)에 효성이 지극하다 하여 나라에서 정려를 내렸으며, 후에 여러번 벼슬하여 그 벼슬이 장예원판결사에 이르렀다. 죽은 후 나라에서 이조판서의 벼슬을 내렸으며, 효간이란 시호를 받았다}이다. 자이당(自怡堂)에 오르니 선생의 글읽는 소리가 들려 오는 듯 했다. 효성이 지극하여 생전에 정려(旌閭)를 받고, 400여년이 넘도록 선비의 사표(師表)로 여겨온 갈천(葛川) 임훈(林薰)선생. 선생은 1500년(연산 6년) 7월 15일 진사(進士) 석천공(石泉公·得蕃)과 진양 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은진(恩津)이고, 자는 중성(仲成)이며 스스로 자이당(自怡堂)이라 호를 지었는데 사람들은 갈천선생이라고 불렀다. 선생은 삼형제 중 맏이로 도계(道溪) 영(英), 첨모당(瞻慕堂) 운(芸)이 아우이다. 도계공은 31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첨모당은 갈천과 생전에 정려를 받을 만큼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덕행 또한 출중하였다. 갈계리 은진(恩津) 임씨(林氏)들은 갈천의 증조부인 의령현감(宜寧縣監)을 지낸 千年(천년)공이 처음 들어왔다 한다. 지금 이 곳에는 삼형제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데, 마을 전체 140가구중 100가구 정도 된다고 한다. 선생이 18세때 당시 경상감사로 온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 1478-1543)이 만나 보고 크게 성공할 인재라고 칭찬하였다. 모재는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으로 당시 사림파의 대표적 인물로 시문에 능했으며,대제학(大提學)을 지낸 인물이다. 갈천은 27세때 모친상을 당하자 아우들과 삼년 시묘살이를 하였다. 41세때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를 하게 되었다. 54세때 성균관의 추천으로 사직서참봉(社稷署參奉)에 제수되어, 2년동안 집경전(集慶殿) 제용감(濟用監) 전생서(典牲署) 참봉 등을 두루 지냈다. 참봉은 종9품 미관말직으로 당시 선생의 나이나 인품으로 보아 어울리지 않은 벼슬자리였다. 하지만 신하된 도리로서 임금의 명을 어길 수 없었고, 어버이의 권장도 있었기에 바로 직무에 나아가 정성으로 맡은 바 임무를 다하였다. 선생의 지극한 충효정신의 일면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때 부친의 연세 이미 팔순이 되어 벼슬자리에 더 머물 수 가 없었다. 부친 봉양을 위해 벼슬을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로부터 아우인 첨모당과 부친을 모시면서 봉양에 한치의 어긋남이 없도록 했다. 선생의 문인이자 동계(桐溪) 정온(鄭蘊)의 부친인 진사(進士) 정유명(鄭惟明)은 행장에 이르기를, {아우인 참봉공과 좌우에서 모시면서 봉양에 어긋남이 없었으며, 기분을 화평하게 하고 뜻을 즐겁게 하였으며 부드러운 소리로 귀를 즐겁게 하였으며 용모를 온순하게 하여 눈을 즐겁게 하였으며 부드러운 마음으로 기쁘게 해드리며 효성으로 받들어 어김이 없었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선생의 효성으로 마을과 나라에서 칭찬이 자자하였다. 이때 선생의 나이 60세였다. 2년 후 부친이 돌아가시자 예를 극진히 하여 3년상을 마쳤다. 복이 끝날 즈음, 현감이 선생 형제분의 효행을 나라에 알리려 하자 사양하였다. 1564년 비로소 명종이 선생 형제분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정려문을 세우도록 하였다. 정려는 충신 효자 열녀를 그들이 사는 마을의 거리에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는 일로 보통당사자가 죽은 후에 시행되었다. 살아서 정려를 받기는 드문 일로 하늘이 내린 효자가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이를 생정려(生旌閭)라 하여 더더욱 가치있게 여겼다. 갈천과 첨모당은 살아서 정려를 받았으니 그야말로 하늘이 내린 효자라 하겠다. 선생 67세때 명종이 경학(經學)에 밝고 품행이 단정한 선비에게 벼슬을 내리고자 했다. 이때 전국에서 선비 6명을 선발하였는데 선생이 그 중 한분이다. 이들에게는 모두 육품직에 제수되었는데 선생은 언양현감(彦陽縣監)에 제수되었다. 언양현감으로 있어면서 마을의 6가지 폐단을 조목조목 상소하여 시정을 요구하였다. 6가지 폐단은 군역, 세금, 부채, 공물제도에 관한 것인데, 백성들의 삶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었다. 명종은 이를 보고 감사에게 전지를 내려 말하기를 『지금 언양현감 임훈의 상소내용을 보니, 자신이 親民의 관직에 있으면서 백성의 곤란을 목격하고 내게 각조의 폐단을 말했으니 내가 가상하게 생각한다. 이 뜻을 언양에 전하라』 하였다. 여기서 선생이 목민관으로서 백성들의 고초를 자신의 일로 여겨 바로잡은 애민정신을 엿볼 수 있다. 70세에 비안현감(比安縣監)에 제수되었다. 임지로 떠나기 전 선조가 불러 하고 싶은 말을 하라고 하였다. 이때 선생은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라 말하고 민생의 폐단을 구제할 것』을 힘써 말하였다. 선생은 외직에 있으면서 백성을 사랑하고 관리를 부리는 데 이르러서는 각각 자신들의 도리를 다하게 하고 신의로써 믿게 하였다. 73세때 아우 첨모당이 세상을 떠나자 심히 애통하게 여겼다. 또 남명 조식의 부음을 듣고 만사를 지어 보냈다. 74세때 지례현감(知禮縣監)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해 10월에 광주목사에 제수되자 나이가 많아 사양하였다. 하지만 임금이 허락치 않아 그 직에 나아가 백성들의 공물과 부역의 폐단을 시정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78세때 장악원정(掌樂院正)을 제수받았지만 사양하였다. 이때 임금이 음식물을 하사하였다. 83세때 통정대부(通政大夫) 장례원판결사(掌隸院判決事)에 제수되었다. 1584년 향년 85세로 세상을 떠났다. 나라에서 약을 지어 전의를 보냈으나 세상을 떠난 뒤였다. 세상을 떠난 후 2년(1586) 안의 용문서원(龍門書院)에 아우인 첨모당과 배향되었다. 1662년 용문서원이 사액(賜額)되었다. 1861년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증직되고, 1871년 효간공(孝簡公)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1996.7.12. 경남일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