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은 경남일보 강동욱기자가 연재한 <江右儒脈>을 옮겨 놓은 것입니다.
합천선비 <사미 문경충> 강 산 풍 월 아름다움 예찬 합천호가 그림처럼 펼쳐진 합천군 대병면 월여산(月如山) 아래 대지(大枝)마을. 그 오른쪽 등 끝에 날개를 펼친 듯이 위엄 있게 서 있는 정자가 있다. 동쪽으로는 황매산이 호위하듯 굽어보고, 남쪽으로는 사천(舍川)이 흘러 그야말로 산자수명한 이곳에 있는 정자는 다름 아닌 사미정(四美亭)이다. 남명선생을 비롯하여 수우당(守愚堂) 최영경(崔永慶), 한말의 면우 곽종석(郭鍾錫), 물천(勿川) 김진호(金鎭祜) 등 인근 대학자들이 풍광을 시로써 읊조리기도 한 사미정. 사미정의 주인은 누구인가. 바로 조선 성종 2년(1494) 삼가 병목( 木) 연화리(蓮花里)에서 진사(進士) 규(珪)와 전주(全州) 이씨(李氏) 사이 4남 1녀중 막내로 출생한 문경충(文敬忠)선생이다.
선생은 남평인(南平人)으로 자는 겸부(兼夫)이며 호는 호음(湖陰) 또는 사미(四美)이다. 10대조 충숙공(忠肅公) 극겸(克謙)은 고려 명종 묘당에 배향된 인물로 합천군 대병면 송호서원(松湖書院)에 모셔져 있다. 선생은 어릴 때부터 뛰어난 자질로 당시 군수가 보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으며 23세때(1516) 당시 영의정 정광필(鄭光弼)의 추천으로, 구령만호(仇寧萬戶)에 제수 되었다. 구령은 서쪽으로 의주 경계까지 20리, 압록강까지 36리에 있는 삭주도호부 소속 땅으로 북방 요충지이다. 만호는 무관직의 하나로 조선 초에 각 도 여러 진(鎭)에 딸린 종4품의 벼슬이다. 이보다 앞서 중종조 경오년(1510) 4월에 삼포에 왜란이 일어났고, 6월에는 안골포에 왜구들이 침입하여 국토를 어지럽힌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중종은 북방의 오랑캐와 남쪽의 왜구들의 침략을 막기 위해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이때 영의정 정광필이 선생을 지략이 뛰어나다 하여 임금께 천거하게 된 것이다. 정광필(1462-1538)은 중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인물로, 1510년 전라도 순찰사로 삼포왜란을 수습하였으며 기묘사화때 조광조를 구하려다 영중추부사로 좌천되기도 하였다. 연산군 때는 임금의 사냥이 너무 잦다고 직언을 하여 아산에 유배되기도 하였다.
선생과 사미정에 올라 시를 읊조렸던 호음 정사룡이 그의 조카이다.
2년동안 구령만호로 북방에서 재직한 후 늙으신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갈 뜻을 임금께 아뢰고 허락을 받아 고향으로 돌아왔다. 임무를 무사히 마치고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지은 시가 문집에 전한다. [천리 밖 변방 일로/ 수 년동안 어머니 뵙지 못했네/ 떳떳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머리를 돌려 임금 은혜 감사 드리네] 어머니 그리는 마음과 임금의 은혜를 생각하는 내용이다. 고향으로 돌아와 어머니 봉양과 독서에 열중하던 중 기묘사화가 일어났다. 이때 자신을 천거해 준 정광필이 좌천되고 어진 선비들이 화를 당하자 벼슬에 뜻을 버리고 학문에 전념하기로 결심을 하였다. 그래서 다음해인 경진년(1520)에 고향 월여산 아래에 사미정을 짓고 평생을 자연과 벗삼아 유유자적하게 보내고자 하였다. 사미정은 [江·山·風·月] 4가지 자연의 아름다움에서 따온 이름이다. 즉 산수의 빼어난 경치의 아름다움과 풍월의 운치가 다 갖추어진 정자라는 뜻이다. 이는 평생을 자연과 벗삼아 유유자적하게 보내고자 하는 선생의 마음이 그대로 담긴 것이라 할 수 있다.
남명선생이 정자 이름을 지었다고 전한다. {나는 인간 세상의 하찮은 미물로서 부모에게 효도하지 못했으니 효에 대해 말할 것이 없고, 임금에게 충성을 못했으니 충성에 대해서도 말할 것이 없다. 형제끼리 우애있게 지내지 못했고 친구들과 믿음을 가지고 사귀지 못했으니 형제와 친구들에 대해 올바르게 처신하는 것도 할말이 없다. 어찌 인간 세상에 용납될 수 있겠는가. 저 강산풍월은 다 말없는 것들이니 내가 이 때문에 네 가지의 말이 없는 것을 좋아한다} 선생이 지은 사미정 기문(記文)의 일부분이다. 이 글은 선생이 부모에게 효도를 못했다거나 임금에 충성을 다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단지 겸양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속뜻은 오히려 시끄러운 벼슬길과 인연을 끊고 자연을 벗삼아 수양을 하면서 일생을 보내려는 생각을 간절히 드러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 사미는 스스로를 경계하는 12대목의 글귀를 벽에 붙여 놓고 자신을 성찰하기도 하였다. 첫째,부모에게 효도하지 않았는가.둘째,임금에게 충성하지 않았는가.셋째,형제간에 화목하게 지내지 않았는가.넷째,부부간에 공경한 마음으로 대하지 않았는가.다섯째,어른들께 공손하지 않았는가.여섯째,벗들과 믿음있게 사기지 않았는가 일곱째 종족과 이웃간에 화목하게 지내지 않았는가.여덟째,주색에 빠지지 않았는가.아홉번째 탐욕에 눈멀지 않았는가. 열번째 다른 사람의 단점을 말하지 않았는가. 열한번째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았는가. 열두번째 사치하지 않았는가 등이다. 사미는 자신이 지은 사미정에서 자연을 벗삼아 보내면서 당시 이름난 선비들과 시를 읊조리면서 학문을 연마하였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남명이다. 지금 행정구역상 사미정은 합천 대병면에 있지만 옛날에는 삼가현(三嘉縣)에 속했다. 남명이 살던 곳과 같은 현에 소속되어 있었다.
남명이 사미정에서 읊은 시는 남명문집에 3수가 전한다. 특히 [잘 바른 담장도 기와 오래 되니 바람에 으스러지고( 墻瓦老風飄去)/ 돌길 이리저리 갈라져도 말이 절로 길을 아는 구나(石路岐深馬自知)}라는 구절은 지금껏 회자되면서 남명과 사미의 돈독한 정을 되새기게 한다. 사미정 가는 길을 남명의 말이 알고 있을 정도로 빈번한 왕래가 있었다는 말이다. 남명의 제자 수우당 최영경(1529-1590)도 사미와 교유했던 인물이다. 그는 {책상 앞에서는 독서의 뜻 새기고/ 창문 밖으로는 산수의 기묘함 구경하네/ 말을 몰아 만호를 후히 함에 뜻 없을 진대/ 돌아와 누워 일가를 살찌게 함만 못하리}라고 하면서 사미의 유유자적한 삶을 시로써 나타내었다. 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 1491-1570)은 선생을 천거했던 정광필의 조카로 대제학을 지냈으며,시문에 뛰어났다. 그의 문집 [湖陰雜稿]에 사미정에서 하룻밤 묵으면서 읊은 시 3수가 전한다. 또 일찍이 의령에 귀양을 오기도 하였으며, 그의 문집에는 의령, 합천지방을 다니면서 지은 시들이 전한다. 일찍이 남명이 [君子人]이라고 칭찬했던 사미 문경충은 향년 62세로 1555년 세상을 떠났다.
세상을 떠난 후 336년 되던 해 1891년 종2품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증직되었고, 그가 일생을 보냈던 사미정은 작년(1995)에 후손들이 중수하여 새롭게 단장돼 유덕을 추모하고 있다.(1996.8.2.경남일보) |